사극에서 과거 시험 장면이 나오면 흔히 궁궐 뜰이나 넓은 마당에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앉아 있는 유생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엄숙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시제(시험 문제)가 걸리면, 유생들은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로 답안지를 채워 나갑니다. 감독관들은 서슬 퍼런 눈으로 부정행위를 감시하고, 조선 최고의 인재를 뽑는 자리다운 팽팽한 긴장감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학창 시절 역사 수업에서도 과거제는 가문보다 개인의 실력을 중시한 능력 중심 선발 제도로 배웠기에, 당연히 시험 현장도 엄격하고 공정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실제 기록을 살펴보면 충격적인 광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선비들이 명당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주먹다짐을 벌이고, 다른 사람이 쓴 답안지를 가로채며, 시험장 담장을 넘어 대리시험을 봐주는 전문 조직까지 판을 쳤습니다. 우리가 흔히 무질서하고 시끄러운 상태를 가리켜 쓰는 '난장판(亂場板)'이라는 단어 자체가 바로 조선 시대 과거 시험장인 '난장(亂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시험장의 실제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자리 선점을 위한 몸싸움: 선접꾼(先接軍)의 등장
과거 시험장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의외로 '어디에 앉느냐'였습니다. 시험장은 넓은 야외 마당이었기 때문에 바람이 덜 불고 채광이 좋으며, 답안지를 가장 먼저 제출할 수 있는 출입구 근처가 최고의 명당이었습니다.
채점관들은 수천 장에 달하는 답안지를 일일이 정독할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기에, 앞쪽에 먼저 접수된 수십 편의 답안지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합격자를 내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이를 '선장(先場)'이라 불렀습니다.
이 때문에 유생들은 과거 시험 전날 밤부터 시험장 문앞에 진을 쳤습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나운 하인이나 힘센 장정들을 미리 고용해 보냈는데, 이들을 '선접꾼'이라 불렀습니다.
시험장 문이 열리면 선접꾼들이 우르르 밀고 들어가 묏자리 잡듯 우산을 꽂고 멍석을 깔며 영역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몽둥이와 주먹이 오가며 피를 흘리는 패싸움이 흔하게 일어났고, 노약자나 힘없는 선비들은 사람들의 발에 짓밟혀 압사하는 참사가 실록에 심심찮게 보고되었습니다.
분업화된 조직 사기극: 거벽(巨擘)과 사수(寫手)
어렵게 자리를 잡았다 해도 글을 짓고 답안을 완성하는 과정 역시 순수한 개인의 실력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과거 시험장에는 합격을 위해 3인 1조, 혹은 수십 명이 팀을 이룬 전문 입시 브로커 조직이 활동했습니다.
이 사기 조직의 핵심 인물은 '거벽(巨擘)'이었습니다. 글재주는 뛰어나지만 신분이 낮거나 집안이 가난해 출세길이 막힌 유학자들을 돈으로 매수해 데려온 '대리 작문가'였습니다. 거벽이 시제를 보고 번개처럼 명문을 지어내면, 글씨를 빠르고 반듯하게 잘 쓰는 '사수(寫手)'가 이를 이어받아 답안지에 정서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응시자인 부유한 양반 자제는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은 그저 옆에서 부채질을 하거나 간식을 먹으며 자리를 지키다가, 완성된 답안지에 자기 이름과 가문만 적어 제출 창구로 달려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실제 실록에는 양반 자제가 천자문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글맹(文盲)인데도 거벽과 사수의 활약 덕분에 장원급제를 차지해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는 고발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커닝 기술과 암거래
대리시험 외에도 개인 단위의 부정행위 역시 기상천외했습니다.
손바닥만 한 얇은 한지에 사서삼경과 예상 답안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붓대 속이나 갓끈, 짚신 밑창, 심지어 엿가락 속에 숨겨 들여오는 '수신(袖身)' 수법이 횡행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에서 과거 시험장의 참상을 한탄하며 "시험장 담장 밖에서 밧줄을 내려 밖에서 미리 지어놓은 답안지를 끌어올리고, 시험관과 결탁해 답안지에 남몰래 먹물 점을 찍어 표식을 남기는 협잡이 일상화되었다"고 개탄했습니다.
심지어 시험관이 친인척이나 세도가의 자제 답안지를 골라내기 위해 시험장 안에서 합격 내정자의 답안지를 통째로 바꿔치기하는 '환부(換父)'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공정해야 할 국가 인재 등용문이 돈과 권력을 가진 특권층의 합법적 관직 세습 창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정조의 개혁과 규장각의 한계
이러한 과거 시험장의 타락을 누구보다 뼈아프게 인식한 군주가 바로 정조였습니다.
정조는 즉위 직후 과거 시험장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암행어사를 투입해 현장 단속을 강화하고, 선접꾼과 거벽 노릇을 하던 자들을 붙잡아 유배를 보내거나 곤장을 쳤습니다. 또한 대형 시험의 부정을 피하기 위해 규장각을 중심으로 소수 정예 인재를 직접 시험 보고 가르치는 '초계문신제'를 운영하며 자구책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간 얽히고설킨 문벌 양반들의 카르텔과 관직 품귀 현상을 법령 몇 개로 뜯어고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 시기로 넘어가면서 과거제는 사실상 매관매직과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자정 능력을 잃고 쇠락해 가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신화화된 과거제의 민낯을 마주하다
사극이 과거 시험장을 엄숙하고 고요한 지식인들의 경연장으로만 묘사하는 이유는 조선 왕조의 유교적 도덕률과 엘리트주의를 이상화하여 보여주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질서정연한 도포 자락과 묵향 가득한 붓놀림은 시각적으로 안정감과 품격을 전달하기에 좋은 소재입니다.
그러나 기록이 증명하는 실제 과거 시험장은 신분 상승과 생존을 위해 온갖 편법과 폭력이 뒤엉킨 처절한 욕망의 난투장이었습니다.
제도가 본래의 공정성을 잃고 감시망이 무너졌을 때 국가의 최고 지성 집단조차 어떻게 부패해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과거 시험장의 난장판 실태는, 시대를 막론하고 '공정한 평가 시스템'을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지 묵직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핵심 요약
'난장판'이라는 단어는 질서가 무너지고 싸움판이 벌어지던 조선 후기 과거 시험장(난장)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앞자리를 선점해 먼저 답안을 내기 위해 힘센 장정인 '선접꾼'을 고용해 폭력 사태와 압사 사고가 빈번했습니다.
글을 짓는 '거벽'과 글씨를 쓰는 '사수'를 돈으로 사서 조직적으로 대리시험을 치르는 부정부패가 만연했습니다.
드라마 속 고요한 과거 시험장과 달리, 몸싸움과 대리시험이 판치던 조선 후기 과거장의 적나라한 실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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