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 조선 후기보다 훨씬 자유로웠던 근거는? (상속과 호적의 진실)


사극이나 전통극을 보다 보면 '조선 시대 여인의 한(恨)'이라는 수식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하여 시집을 가면 친정과는 남이 되어야 했고, 남편이 죽어도 수절을 강요받았으며, 칠거지악이라는 족쇄 아래 이혼의 권리조차 갖지 못했던 이미지가 한국 전통 사회 여성의 표준처럼 굳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기록을 한 시대만 거슬러 올라가 고려 시대를 들여다보면, 현대인조차 깜짝 놀랄 만큼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가족 제도를 마주하게 됩니다.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아들과 똑같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여성이 한 집안의 호주(戶主)가 되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과연 고려 시대 여성들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요? 당대의 호적과 분재기(재산 상속 문서), 묘지명 등의 실물 사료를 통해 조선 후기의 가부장제와는 완전히 달랐던 고려 사회의 진실을 짚어보겠습니다.

재산 상속의 절대 원칙: 남녀균분상속(男女均分相續)

조선 후기에는 장남이 가문의 제사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유산의 대부분을 독식하고, 출가한 딸에게는 재산을 거의 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기본 원칙은 철저한 '균분상속'이었습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맏이든 막내든, 심지어 혼인을 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부모의 토지와 노비를 공평하게 n분의 1로 나누었습니다.

실제 남아 있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분재기를 보면, 딸에게 상속된 노비와 전답의 규모가 아들과 완전히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부모는 딸이 시집갈 때 단순히 살림살이 몇 개를 챙겨주는 수준이 아니라, 평생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막대한 부동산과 인적 자산을 명의 이전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경제적 자립권이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여성들은 시댁이나 남편에게 맹목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가정 내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제사도 돌아가며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받았다는 것은 그에 따른 의무도 동등하게 짊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일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제사를 장남 혹은 장손이 독점하는 종법제가 정착되었지만, 고려 시대에는 아들과 딸이 해마다 번갈아 가며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가 기본 관습이었습니다. 올해는 큰아들 집에서, 내년에는 맏딸 집에서, 그다음 해에는 둘째 딸 집에서 조상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만약 아들이 없는 집안이라도 대를 잇기 위해 무리하게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딸이 제사를 온전히 이어받으면 그만이었고, 사위나 외손자가 제사를 모시는 외손봉사(外孫奉祀) 역시 사회적으로 완전히 공인된 정당한 예법이었습니다.

시집살이가 아닌 '장가살이':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우리가 흔히 쓰는 '시집간다'는 말과 달리, 고려 시대의 혼인 풍습은 글자 그대로 '장가(丈家)간다'였습니다. 즉, 혼인을 하면 남성이 신부의 집으로 들어가 처가살이를 하는 '남귀여가혼(서옥제 계열의 솔서혼)'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신랑은 혼인 후 처가 마당에 마련된 별채에서 생활하며 자식을 낳아 기르고, 그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처가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평생을 처가 곁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남성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여성은 자신이 나고 자란 익숙한 친정 부모와 형제들의 울타리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혹한 '시집살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웠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함부로 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처가 식구들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감히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호적에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된 여성

가족 내 여성의 위상은 호적(호구단자) 기록 방식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조선 후기의 호적은 아들을 먼저 나이순으로 적은 뒤, 딸은 맨 뒤로 빼거나 심지어 이름조차 없이 '사위의 성씨'만 기록하는 등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반면 고려 시대의 호적은 성별과 무관하게 오직 '태어난 순서(연령순)'대로 자녀를 기재했습니다. 맏이가 딸이면 호적 맨 윗자리에 맏딸의 이름이 올라갔고, 그 아래로 남동생이 적혔습니다. 여성이 한 가구의 경제적 실권을 쥐고 세금을 납부하는 책임자인 '호주'로 등재되는 사례도 실록과 사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재혼과 이혼의 자유, 흠이 아니었던 시대

조선 시대에는 성종 대 '재가녀 자손 등과 금지법'이 제정되면서 과부의 재혼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재혼한 여성의 자식은 과거 시험조차 보지 못하게 차별했습니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는 과부의 재가(再嫁)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남편과 사별하거나 성격 차이로 헤어지더라도 사회적 지탄을 받지 않았으며, 본인이 물려받은 재산을 그대로 지닌 채 새로운 배우자를 맞아 가정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왕실에서도 남편과 사별한 여성이 왕비로 책봉되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국가 역시 여성의 정절을 빌미로 재혼을 막거나 사회적 불이익을 주지 않았습니다. 유교적 순결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기 전이었기에, 혼인과 결별은 개인과 가문의 현실적인 선택의 문제였을 뿐 도덕적 낙인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가부장제는 '영원한 전통'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우리 민족의 오랜 고유 전통'이라고 믿어온 엄격한 남존여비와 시집살이 문화는 사실 5천 년 역사 전체로 보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거대한 전란을 겪은 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무너진 사회 질서를 다잡기 위해 성리학적 종법제를 극단적으로 강화하면서 만들어진 '불과 300여 년 남짓 된 특수한 시대상'에 불과합니다.

고려 시대의 유물과 문헌이 증명하듯, 한반도의 역사 속 여성들은 당당히 재산권을 행사하고, 부모를 부양하며, 삶의 주체로서 활기차게 살아갔습니다. 역사를 한 꺼풀만 벗겨내도 우리가 '전통'이라 규정해 온 수많은 관념이 얼마나 좁은 시야에 갇혀 있었는지 명확히 드러납니다.

핵심 요약

  • 고려 시대에는 아들과 딸 구분 없이 부모의 토지와 노비를 공평하게 나누는 '남녀균분상속'이 철저히 지켜졌습니다.

  • 혼인 후 남성이 처가에 들어가 사는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이었으며, 제사 또한 형제자매가 돌아가며 모시는 '윤회봉사'를 행했습니다.

  • 호적에 남녀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되었고, 과부의 재혼이나 이혼 역시 사회적 지탄이나 법적 제약을 받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의 엄격한 가부장제보다 수백 년 전 고려 시대의 가족 제도가 훨씬 현대적이었다는 사실,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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